1907년 조영례 소녀(당시 9세)가 동대문 보구여관에 입원 중 전도를 받음.
퇴원 후 본인 집에서 매주 목요 기도회로 모임.
1908년 이흥산씨 가족 전도
조영례의 전도로 믿게 된 10여명이 이흥산씨 댁에서 기도회로 모임
– 학습인 9명, 세례인 9명, 세례 아동 3명, 원입인 21명, 총 42명 –
1909년 용두리에 한옥 한 채 구입 예배처 마련(베커기념예배처로 명명, 자체헌금 25원, 베커헌금 60달러)
용두리교회가 창설되고 동대문구역으로 편입됨.
초대 담임목회자 벙커 목사 (동대문구역 담당 목사)
1910년 용두리 지역 순행 담당 손창현 전도사 부임
1911년 용두리 지역 순행 담당 김인권 전도사 부임
용두리여학교 설립
1912년 용두리 지역 순행 담당 신영희 전도사 부임
교인들은 교회 신축을 위하여 성미를 시작하고 부인들은 패물을 바치는 등 열성을 다한 헌금을 거듭하여 3년 후인 1915년에는 총액 1,050원이 됨.
1915년 여 선교사 홀의 주선으로 헌금 1,050원을 기금으로 하여 400평의 대지에 벽돌집 1층 16평의 용머리예배당과 벽돌집 2층 연건평 53평 용두리여학교 교사를 신축함.
1916년 신영희 전도사는 본처 전도사로 유임함.
교회학교 창설
1920년 2대 담임목회자 최상현 전도사 부임 (1920년 연회에서 동대문구역으로 파송)
1922년 동대문구역에서 용두리구역으로 독립
3대 담임목회자 박희도 전도사 부임 (민족대표 33인중 한명, 부임 3개월 만에 필화사건으로 투옥됨)
용두리유치원 개원
1923년 4대 담임목회자 박원백 목사 부임
숭인야학 인계받아 운영
1925년 당시 서울지방 15지역 중 여섯 번째로 큰 구역으로 급성장
용두리구역(용두동교회, 각심사교회, 납대울교회, 창동교회)
– 입교인 112명, 학습인 78명, 세례아동 37명, 원입인 188명, 합계 415명 –
1926년 고룡소년회 창설 (고룡학원 후원, 시민운동도모)
고룡학원 설립 – 지역의 미진학 청년 교육
1929년 5대 담임목회자 전효배 목사 부임
청년지도에 각별한 관심 : 청년회조직, 성가대 조직
중단되었던 유치원 새로이 운영
목사관, 전도사관 신축
1933년 6대 담임목회자 이필주 목사 부임 (민족대표 33인중 한명, 1942년 73세로 소천)
1934년 7대 담임목회자 조신일 목사 부임
교회 증축 계획 (벙어리 저금통에 저금)
1935년 8대 담임목회자 전효배 목사 재부임 (1939년 이임)
1939년 9대 담임목회자 김순철 목사 부임 (약 2년 6개월 재임)
1941년 10대 담임목회자 김산 목사 부임 (교회 폐쇄시까지 재임)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비행기(애국기 감리교단호) 헌납 헌금이란 명목으로 교회 및 부속건물, 토지 일체가 강제 처분되고 교인은 신설정교회(현 보문제일교회)에 통합되었으나 다수가 흩어짐.
1946년 김항묵 장로, 김도경 장로를 중심으로 교회를 재건하고 강제 처분되었던 과거 건물에 들어가 예배함.
11대 담임목회자 이봉구 목사 부임 (당시 전도사)
1947년 최사집 전도사 부임 (22년간 재임)
1950년 강제 처분되었던 예배당 반환 소송에서 패소하여 제기동 67-17 번지에 부지를 마련하고 동성교회로 명명
동성교회 예배당 기공 예배(1950. 6. 10)를 드렸으나 6․25 사변으로 공사 중단